카테고리 없음

공적영지에 대한 이론적 배경 (화엄론)

밴마철 2023. 9. 11. 19:42

어제 공적영지는 돈오점수에서 돈오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텅비고 고요한 본래모습이 공적이고 이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영지였습니다. 이것이 점차적인 것이 아니라 갑자기 단박에 온다는 것이 돈오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하택신회가 말하는 돈오는 수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오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의 첫 단계에서 오는 어떤 실존적 결단 같은 것입니다. 이런 실존적 결단인 돈오를 바탕으로 수행을 점차적으로 해 나간다는 것이 점수입니다. 길희성 선생님과 같은 분은 회광반조(回光返照)로 설명합니다. 욕망 같은 것에 이끌여 외부로 달려 나가버리는 빛을 되돌려 자기 내면의 본 모습을 비추어 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롯해 모든 종교는 그것을 참으로 믿으려고 하면 어떤 순간적에 계기로 자기를 거기에 받치겠다고 하는 내면의 결단이 필요 한데 내면을 돌아아 보는 것이 공적이고 이런 내면의 알아차림이 영지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종교에 투신하기 위하여 마음을 고쳐먹는 회심이 필요합니다. 이런 회심의 일환으로 자기의 본래 모습의 내면의 알아차림인 공적영지가 바로 돈오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즉 돈오는 수행의 시작점이지 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고 불안전한 것입니다. 점수라는 수행을 통하여 완성해 나가야 할 그 무엇입니다. 

그런데 마조도일 임제의현 같은 분들은 돈오를 완전한 깨달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평상심이 도이이다고 하여 물긷고 나무하는 것이 불성의 작용이다고 하면 물긷고 나무하는 것에서 완전한 깨우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고 하여 자기가 서 있는 상황에서 자기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이 진리가 된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완전한 것이면 더 이상의 수행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완전한 깨우침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대 자유를 얻었는데 더 이상 무슨 수행이 필요하겠습니까? 점수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돈오돈수라고 합니다. 문득 완전한 깨달음 얻어 그것으로 문득 대 자유를 획득했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독단이나 배타성을 띨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제어할 그런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독재자의 모습과 비슷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중국의 불교를 크게 분류할 때 교종과 선종으로 나눕니다. 교종은 이론적 불교 뜻입니다. 불성이라는 무엇이고 그것이 세계에는 어떻게 펼처져 있고  우리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식으로 전개되는가 이러한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교종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화엄종입니다. 화엄종은 이 세상이 사사무애의 세계로 인드라망 처럼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욕심에 출렁거려서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하여 마음을 잔잔히 하면 호수 속에 주변의 산이 다 비치게 됩니다.  이것을 해인삼매라고 합니다. 마음에 비유되는 잔잔한 바다에 모든 것이 도장이 찍히듯이 세상의 본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인 요점은 이런데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런 화엄종의 이론은 복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평생을 해도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론적 번쇄함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 선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외별전이라고 가르침이외에 깨우침이 있다. 불립문자라고 하여 깨우침은 문자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하여 그것은 말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견성성불 마음속에서 바로 불성을 보고 깨우침의 완성자인 부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한마디로 하면 수증론(修證論)이라고 합니다. 수증이라는 뜻은 닦아서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수행을 통해 자신이 부처임을 증명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선종에도 대단히 많은 유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이 마조도일에서 임제의현의 학파입니다. 이것을 홍주종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선종하면 이 홍주종을 연상해도 됩니다. 

이렇게 보면 교종의 대표는 화엄종이고 선종의 대표는 홍주종이라고 이해하셔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교종이 대표자 화엄종 선종의 대표자인 당시 중국의 사상계를 나누어 가졌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서로의 영역 싸움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이런 싸음에는 또 당연히 중재하려는 것도 나타날 수 밖에 없지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종밀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선종와 교종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했습니다. 그 선교일치의 이론적 배경으로 하택신회가 말한 공적영지론을 가지고 옵니다. 공적영지에서 영지는 어째든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앎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선종에서 알음알이라고 하여 적극적으로 지식적인 앎을 배격하는 것에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앎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 심리조작을 당하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스스로 개념의 감옥에 빠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런 개념의 지식에서 빠져 나오 해방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개념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도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통 비판적 지식이라고도 합니다. 홍주종처럼 모든 앎을 배격하면 현실을 발을 디딜 수가 없습니다. 종밀은 홍주주종처럼 한다면 몽둥이로 사람을 죽이고도 이것은 불성의 작용이다고 강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앎으로 이루어 진 어떠한 사회적 구속도 모두 외면한다면 이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종에서도 앎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공적영지를 재해석합니다. 불교라고 하면 기본적인 가르침과 그것에 근거한 규제 통제는 있어야 한다는 합니다. 이후 재가 불교학자인 이통현 장자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런 주장을 다시합니다. 그러면서 화엄교학을 재정비합니다. 보조지눌 국사는 이 이통현의 이론에 크게 의지합니다. 한 80%는 이 이통현에 의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론적 지식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해야 하느냐? 아니면 완전 배격해야 하느냐? 이런 문제는기독교에서도 그 상황이  비슷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말씀하신 절대적 진리인 만큼 거기에 어떤 토도 달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복음주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도 어떤 역사적 전통이라는 배경에서 나왔음으로 그 배경에서 성경을 조망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역사비평이라고 하는데 그 원조가 니이체의 계보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 지를 완전히 도외시하고 자기가 믿는 것만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깨우친 것만 절대적이라고 한 홍주종은 복음주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길희성 선생님의 영적 휴머니즘은 일종의 선교일치 혹은 복음주의와 자유주의의 통합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대혜종고의 간화선에 좀 해보겠습니다. 보조지눌은  이통현에 80% 대혜종고에 20% 정도 의존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논의들에 대한 서로 간의 토론도 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 블러그 댓글로는 현장성도 떨어지고 또 올리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메인 글은 이 블러그를 통해서 쓰고 서로 간의 의견교환은 카카오 채팅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밴마철이라는 채팅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의견 나누실 분은 그곳으로 오십시요. 제 이름은 안영상이고 전화번호는 778 689 9238 이고 이메일은 youngsangahn59@gmail.com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친구추가 하면 될 것 같습니다.